70대,80대 두 작가는 왜 모성적 공간으로 회귀했을까

인간은 모성적 공간으로의 회귀적 본능이 있다. 자신이 태어난 모태적 공간이다. 생명이 탄생하고 시작되는 지점이다. 수도자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우선 목표로 삼았던 것도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기 위해서다. 화가들도 예외가 아니다. 미술사의 거장들이 때론 ‘아동화로 돌아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이유다. 새롭게 태어나는 미술사조들은 그렇게 시작되기도 했다. 오세열 화백이 어린아이 같은 그림을 그리는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유아기적.모성적 공간으로의 지향은 예술가들에게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그림으로 유명한 70대 오세열 작가에게도 유아기적 지향은 강력한 창조적 에너지가 되고 있다.

물의 화가 안영일 화백도 자궁의 양수 같은 모태적 공간인 물에 주목해 왔다. 색점으로 햇빛이 쏟아지는 형형색색 찬란한 바다의 모습을 구현하는 재미작가다. 50년간 미국에서 활동하며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로스앤젤레스 LA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한국인 최초로 개인전을 개최하며 주목을 받았다. 30년 넘는 시간동안 바다를 탐구하여 그려낸 물(Water)시리즈로 이름을 알렸다. 두 작가의 신작을 선보이는 전시가 6월 20일까지 갤러리 조은에서 열린다.

오세열 작가는 사람의 얼굴과 몸, 나열된 숫자, 단추, 꽃, 넥타이 등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재들을 화폭에 등장시킨다. 마치 아동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이다. 칠판에 백묵으로 낙서한 듯, 벽을 긁어낸 듯 거칠게 표현한 인물상이 등장한다. 그 지향점은 ‘순수했던 유년으로의 복귀’다. 그래서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할 땐 동심으로 가득 찬 어린아이의 그림이 아닌지 오해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캔버스에 다가가보면 전혀 다른 묵직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오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유화물감만을 사용해 무수히 덧대 칠해진 물감의 흔적에서는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품에 세월과 함께 자연스레 ‘크랙(crack)’이 생기는 이유다. 마치 사람의 얼굴에 생기는 ‘인생 주름’이다.

오 작가는 에스키스(Esquisse, 초벌그림)을 안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대부분 처음 붓을 잡으며 작품 구상을 하고 결론까지 연상하며 작업하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 나도 무엇을 그릴지 모르고 시작한다. 그래서 어떤 그림이 나올까, 스스로 궁금해질 때가 많다.”

그래서 일까? 그의 그림은 비슷한 것이 없고, 계산된 가식이 없다. 어린 시절 한번은 있을 법한 추억, 온 종일 놀이터에 머물다 바닥에 나뭇가지로 흔적을 남기고 돌아가던 우리 모두의 기억과 닮아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앞에 서면 유년시절의 기억과 마주하게 되면서 오랜 시간 머물게 된다.

“내게 캔버스는 동심의 도화지다. 현대사회가 얼마나 메말랐는가. 그림은 즐거워야한다. 보는 사람이 재미있다,즐겁다고 느끼면 족하다.”

오세열 작가는 서울에서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유난히 즐겼다. 부모님이 도배를 새로 하면 그게 도화지로 보이곤 해, 그 위에 그림을 그려 혼난 기억도 여러 번이다. 이 모습은 최근 작품에서도 ‘장난기’라는 맥락 위에서 여전히 드러난다.

오 작가는 중학교 때 미술부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대학 진학은 서라벌예술대학 회화과로 했다. 대학 진학 후 수업시간때는 구상 작품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곧 진부함을 느끼고 형태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관습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러다 보니 구상도 아니고 추상도 아닌 반추상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찾았다.

조선화랑, 진화랑 등 당대 최고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며 30대를 보냈다. 서른아홉에 유럽의 대표적 아트페어인 파리 피악(Fiac, 1984)에서 남관, 박서보, 김기린, 이우환 등과 함께 작품을 선보였다. 프랑스 미술계 인사들에게 높은 평을 받는 동시에 유일하게 판매가 이루어져 큰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국 소속 갤러리를 통해 작품을 프랑스에 소개한 김창렬, 이우환 작가의 작품이 판매 된 적은 있었으나 한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이 판매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페어에도 작품을 출품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는 등 한국 미술의 해외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기 산업사회, 고도 소비 사회 병리 현상에 대한 대항적이고 치유적인 메시지를 미술을 통해 보여주고 싶다.”

오 작가는 한국전쟁 이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후기 산업사회를 살아낸 세대다. 그는 성장을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 내몰려 살았다. 물신과 욕망의 생채기들에 아파했다.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통해 대항적이며 치유적인 메시지를 던지고자 한다.”

그가 생각하지 않고 본능에 의존한 채 의식 속에서 무의식을 찾고자 하는 시도를 하는 이유다. 그의 작품이 즉흥적이며 결과물이 예측 불가능하다. 그래서 작가는 캔버스와 마주하는 순간순간이 모두 치열하고 긴장되는 동시에 설레기도 한다고 했다.

“캔버스는 내 자신의 몸이라고 생각한다. 캔버스 위에 기름기를 뺀 유화 물감을 여러 번 덧발라 두꺼운 바탕을 마련한 뒤에 붓 대신 면도날이나 칼로 표면을 긁어내며 이미지를 만들다 보면, 마치 내 몸을 깎아내고 상처를 내는 수행을 하는 것만 같다.”

그렇게 물감을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하면 결국에는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던 색들도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이 마치 내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어 마주하는 것 같다.”


오 작가는 좀처럼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단색 배경에 관람객이 집중할 만한 소재를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회화성은 물론 회화 언어를 극대화한다. 표현이 최소화될수록 캔버스의 평면은 침묵의 열기로 들뜨게 된다.

작가는 인물을 중심으로 숫자 그리고 오브제로 소재를 발전시켜 작품을 완성한다. 숫자는 어린시절 낙서의 주요 소재이자 싫든 좋든 죽을 때까지 우리는 숫자를 떠나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숫자의 노예가 된 삶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없는 불완전한 몸을 가진 인물은 무표정한 얼굴로 화면 위에 뻣뻣하게 누워 있다. 작가는 이를 ‘백치와 같은 사람’이라고 일컫는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박약한 사람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고 애틋한 애정을 가지다 보니 자연스레 그를 작품에 등장시키게 되었다. 한편 정신적으로 빈곤하고 불행한 현대인의 투영이기도 하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풍요로 연결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반영이다. 작가는 화폭 안의 인물들 주위로 단추, 장난감 따위의 천진한 오브제를 늘어놓거나 숫자나 드로잉 따위의 낙서 같은 기호들을 새긴다.

“쓸쓸한 인물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감싸 안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다.”

오 작가는 대학 시절 가장 존경한 예술가로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를 꼽는다. 파울 클레를 포함해 피카소, 뒤뷔페 등 20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은 ‘아동화로 돌아가라’는 표어를 유행시키며 유년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바 있다. 선입견을 떨치고 순수한 시선으로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자는 의도였다. 또 다른 미래로 향하는 새로운 시선의 확보이기도 하다.

오 작가의 그림은 틀에 얽매이지 않은 의외성과 신선미가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유년기의 어렴풋한 기억에 기반하여 직관적으로 화면을 구성한다. 화면 위에 어린아이 낙서와 같은 이미지들을 새겨내거나 의도적으로 서툴게 그린 인물들을 배치한다. 오세열의 화폭 위에서 숫자와 형태들은 본래의 의미를 떠나 이미지 그 자체가 된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무구한 눈’을 획득하는 일을 통해 스스로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본능과 무의식을 찾고자 한다. 대상의 본질적 순수를 바라보고 탐구하려는 노력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 보다 애써 못 그리는 것이 더 어렵다.

목원대 교수를 정년하고 3년 전 대전에서 올라와 양평에 작업실을 마련한 오 작가는 마음도 그림도 자꾸 ‘어린애스러워’지고 싶다고 했다.

“70세를 넘기면서 한 살 한 살 어려지길 바란다. 어린 친구들이 칠판에 그린 것처럼 보이게 인물을 표현했다. 아이들이 내 스승이다. 그림을 못 그린다는 소리를 들으면 칭찬 같다.”

그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노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안영일 화백은 1934년 개성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내게 물은 단순한 물이 아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경험한 물과의 극적 조우가 담긴 신비하고 영험한 상징적 존재로서의 물이다. 어느 날 바다낚시를 나갔다가 생과 사를 넘나들었던 순간, 믿기 힘들만큼 아름다운 절정의 모습을 물에서 봤다.”
그의 작품을 근접해서 보면 정사각형들 사이로 빛이 흘러 나오 듯 다양한 색상의 모자이크 형상을 찾아 볼 수 있다. 나이프로 두껍게 칠해진 물감은 물결에 반사된 찬란한 빛의 움직임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늘 시작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힐때가 많다. 그러나 이제야 겨우 뭔가 보이는 것 같다. 지금부터 정말 그리고 싶은 작품을 해 볼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보기도 한다. 계속 변화하고 있는 나의 작업은 멈춤도 없고 완성도 없다. 살아있는 한 나는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릴 것이다.”

80대 작가인 그는 여전히 그림에 갈증을 느낀다고 했다.영원한 현역이다. 편완식 객원미술전문기자